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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혁연 초빙교수 "청주진위대 해산 후에도 '항일운동' 이어간 배창근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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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진수 작성일2023.03.0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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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조혁연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 진행 : 이호상 기자

■ 2023년 3월 2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충북저널967' (청주FM 96.7MHz 충주FM 106.7MHz)

■ 코너명 : 라디오 충북역사 기행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방송 다시 듣기는 BBS청주불교방송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습니다)

 

▷이호상 : 조혁연 교수의 ‘라디오 충북 역사 기행’ 떠나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조혁연 교수 연결돼있습니다. 조 교수님, 나와계시죠? 안녕하십니까. 

 

▶조혁연 : 안녕하세요.

 

▷이호상 : 교수님, 잘 지내셨죠?

 

▶조혁연 : 잘 지냈습니다. 

 

▷이호상 : 오늘 준비해주신 소식은 ‘청주 배창근의 의병 활동과 순국’ 이야기를 준비했다구요. 먼저 배창근이라는 인물을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요.  

 

▶조혁연 : 일반인들한테는 다소 생소한 인물인데요. 그는 북문로에 살았던, 흔치 않은 기독교인 출신의 의병입니다. 1869년에 태어나 1909년에 순국을 했습니다. 대한제국기 군대인 청주진위대 소속의 하사관이었던 그는 1907년 8월 청주진위대가 강제 해산 당하자 의병으로 전환합니다. 이후 진천 초평면에서 일본 병사 2명을 살해했고, 그로 인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습니다.

 

▷이호상 : 청주 출신이고요. 1869년에 태어나 1909년, 그러니까 경술국치 전에 바로 순국을 하셨군요. 대한제국기 군대인 청주진위대, 제가 알기로는 구한말 지방군대로 알고 있는데 청주 진위대라는 군대, 구체적으로 어떤 군대인가요?

 

▶조혁연 : 고종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하자, 극도의 불안을 느꼈고 그러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죠. 이른바 ‘아관파천’이죠. 그 후 1년 만에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부국강병책을 제시하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설립된 지방군대의 하나가 ‘청주 진위대’입니다. 청주진위대는 과거 청원군청 지금은 청주 임시청사죠. 그 뒷 건물인 청녕각을 부대 건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호상 : 그렇군요. 그런데 당시 청주 진위대 해산 모습이 사료로 남아 있다면서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 당시에. 

 

▶조혁연 : 일제강점기 청주에 살았던 오쿠마 온보라는 사람이 <청주연혁지>를 썼는데, 거기에 청주진위대 해산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착검과 동시에 청녕각 윗쪽에서 진위대 방사가 있는 방향으로 순간적으로 진격해 와서 일제히 총구를 겨누게 되었다. 진위대장은 이에 힘을 얻어 포고문을 낭독하였다. 이때에 들을 수 있었던 소리는 늠름하였으나 진위대 병사들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두 뺨에 흘러내렸다.”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호상 : 강제 해산된거군요. 그런데 강제 해산 당한 대한제국기의 청주 진위대, 그런데 그 속에 있던 군인 배창근은 그 후 어떤 선택을 하나요? 바로 해산이 된 건데, 자연인으로 돌아갑니까?

 

▶조혁연 : 그렇지 않고요. 배창근은 고민 끝에 의병의 길은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에 관한 이야기는 그 후 그의 아들 배민수가 쓴 ‘배민수 자서전’이 있는데, 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이 우리의 군대를 제멋대로 해산시키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생업을 찾는 대신 일본에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뜻을 같이 하는 부하들과 함께 청주 북문동 ‘박과부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아버지를 의병대장으로 하는 결사대가 편성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호상 : 청주 북문로 박 과부 집에서 비밀모임을 했다, 아버지를 의병대장으로 해서 결사대가 편성됐다는 말씀. 앞서 교수님께서 설명해주시길 배창근을 ‘흔치 않은 기독교인 의병’이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는 어려웠을텐데, 언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나요.

 

▶조혁연 : 청주 진위대 해산 직후입니다. 군대 해산으로 직장을 잃은 배창근은 가세가 기울자 북문로에서 남문로로 전세 이사를 하게 됩니다. 이때 집주인은 청주읍성교회(현 청주제일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그러면서 배창근 가족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청주 최초의 근대식 건물인 양관을 세운 프레드릭 밀러, 즉 민노아 선교사도 만나게 됩니다.

 

▷이호상 : 그럼 교수님께서 서두에 언급한, 배창근 의병이 일본인 병사 2명을 살해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진천 초평이었거든요. 초평 저수지가 있는 곳, 초평으로 가게 되는건가요, 의병활동을 하러? 

 

▶조혁연 : 그렇습니다. 청주 진위대가 해산당한 후 직업을 잃은 배창근은 ‘염곽상, 어떻게 보면 직업도 아닌데요. 마른미역 장수를 하고 있었는데요. 

 

▷이호상 : 아, 염곽상이 미역장사를 말하는 건가요?

 

▶조혁연 : 마른 미역장수요. 옛날에 보면 마른 미역을 몸에 두르고 다니며 팔고 했던 사람들을 염곽상이라고 했는데요. 그런 중에 1907년 7월 순찰 나왔던 일본인 병사 2명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진천 초평 ‘사방기’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서 박과부집 결의를 했던 다른 의병과 함께 일본인 병사를 공격해 살해하게 됩니다. 

 

▷이호상 : 배창근은 바로 현장에서 체포됐을까요?

 

▶조혁연 : 바로 체포되지 않았고요. 그로부터 한달 후에 수사를 하던 남문로 집에 일본인 경찰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그 내용이 아들 ‘배민수 자서전’에 상세히 기록돼있는데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버지는 불시에 들이닥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수갑을 찬 채 끌려가셨다. 그들은 말을 타고 갔지만, 아버지는 짐승처럼 줄에 묶인 채 20km가 넘는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갔지만, 너무 어린 탓에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으시고, 몇 시간이나 정신없이 흐느꼈다.” 이렇게 적었는데요 청주서 20km면 천안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천안에 수감됐다가 이감됐습니다.

 

▷이호상 : 자서전에는 아들 배민수가 아버지 배창근을 면회하는 장면도 기록돼 있다면서요.

 

▶조혁연 : 배창근은 사형집행을 앞두고 서대문교도소로 마지막 면회를 할 수 있다고 통보를 받게 됩니다. 이때 아버지는 세 가지 유언을 하게됩니다. 네 자신을 잘 돌봐라,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우리나라를 잘 지켜야 한다, 이렇게 세 가지를 유언하게 되는데요. 시간 관계상 두 번째 유언 대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둘째로,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지금은 너만이 어머니를 위할 수 있고, 보살펴 드릴 수가 있단다. 아버지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다면, 네 어머니에게 정말 잘 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 아버지에게는 더 이상 그런 기회가 없으니, 네가 내 몫까지 어머니를 돌봐 드려야지. 안 그러냐” “네 아버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호상 : 그 흉악스러웠다는 서대문 교도소에서 면회를 온 아들이 자서전에 쓴 건데 말이죠. 그러면 배창근 의병이 교수형 순국을 당한 건 언제입니까?

 

▶조혁연 : 네. 그로부터 2년 후인데요, 자서전에는 순국 날짜가 ‘며칠 후’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청주의병 배창근의 처형 사실은 <순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짧게 기록돼 있습니다. 두 사료를 보면 배창근은 1909년 7월 9일 서대문교도소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호상 : 순국한 의병 배창근은 혹시 시신으로라도 청주로 돌아왔습니까?

 

▶조혁연 : 청주는 돌아오지 못하는데요, 자서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며칠 후 서울 서대문교도소로부터 ‘시신을 가져가 장사지내도 좋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예정대로 처형되었고 시신을 가져가 장사지내도 좋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서울로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받았다. 우리는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교수형을 당한 것임을 알았다.아버지의 시신은 감옥에서 멀리 떨어진 무학산에 묻혔다.”이렇게 돼있는데요. 무학산은 지금의 서울 연세대학교 뒷산을 말합니다.

 

▷이호상 : 갑자기 교수님 궁금해진 것이 자서전을 쓴, 청주의병 배창근의 아들 배민수씨는 훗날 어떻게 성장했는지도 궁금한데요.

 

▶조혁연 : 네. ‘배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결단으로, 조치원역에서 어머니·누나들과 눈물로 이별하고 평양 숭실학교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는 등 두 차례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이후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귀국해, 삼애농장을 세우는 등 농촌운동에 전념을 하게 됩니다. 배창근과 배민수, 두 부자에게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함께 추서됐습니다.

 

▷이호상 : 이 두 분 다 청주가 낳은 훌륭한 아들인데 두 분에 대한 역사적 조명을 다시 한 번 해서 청주에 있는 충북 도민들도 이 분들에 대해 기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교수님 시간 때문에 여기서 마무리 하고요. 다음시간에 또 좋은 역사기행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조혁연 : 네 고맙습니다.

 

▷이호상 : 지금까지 조혁연 교수의 라디오 충북 역사기행, 오늘은 ‘배창근과 순국’이란 제목으로 이야기 나눠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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