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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혁연 초빙교수 "조선시대 '일천즉천' 관습에 인구 절반 가량이 노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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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진수 작성일2023.05.1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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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조혁연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 진행 : 연현철 기자

■ 2023년 5월 11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충북저널967' (청주FM 96.7MHz 충주FM 106.7MHz)

■ 코너명 : 라디오 충북역사 기행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방송 다시 듣기는 BBS청주불교방송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습니다)

 

▷연현철 : 충북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라디오 충북 역사 기행’ 코너입니다. 오늘도 조혁연 초빙 교수 전화 연결돼있습니다. 조 교수님 나와계시죠, 안녕하십니까. 

 

▶조혁연 : 안녕하세요. 

 

▷연현철 : 교수님, 오늘 또 노비 이야기 준비해주셨습니다. ‘노비 두 번째 이야기’를 준비했다구요. 먼저 전체 인구 중 노비가 차지했던 비율부터 좀 알아볼까요. 삼국시대부터 짚어주신다고요.

 

▶조혁연 : 삼국시대 노비 비율을 알 수 있는 사료로는 우리 고장 청주지역의 4개 당시 촌락을 대상으로 작성된 문서가 있죠. 이른바 ‘신라장적’인데요. 이 사료를 보면 청주지역 4개 촌락의 당시 총인구수는 442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노비는 19명이었습니다. 대략 6% 정도로 그리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현철 : 이런 노비 비율이 고려 후기부터 증가한다고 하던데 역사적으로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조혁연 : 한 마디로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인데요. 익히 알다시피 고려 후기가 되면 무신들이 정권을 잡죠. 그런데 이 무신들은 굉장히 탐욕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국가시스템은 붕괴됐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그 결과, 압량위천, 투탁, 자매 현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연현철 : 압량위천, 투탁, 자매 다소 생소한 표현이라서요. 어떤 뜻인가요.

 

▶조혁연 : 압량위천은 말 그대로 지배층인 권력자가 양인, 즉 평민에게 강압을 가해 노비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압량위천된 양민, 평민은 그 주인집의 노동력이자 재산이 됩니다. 반면에 ‘투탁’은 먹을 것이 너무 없다 보니 권력자의 집을 찾아가 자발적인 노비, 즉 셀프 노비가 되어서 배고픔을 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밖에 ‘자매’는 투탁과 약간 비슷하면서 다른 면이 있는데요, 몸값을 받고 자신이나 자신의 처자식을 종으로 파는 것을 말합니다.

 

▷연현철 : 그래서 국가시스템이 붕괴됐고, 백성들 삶이 피폐해졌다고 말씀하신거군요. 어찌됐든 고려 후기가 되면 우리나라 노비역사의 가장 악질적인 요소였던 ‘일천즉천’ 관습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면서요. ‘일천즉천’, 어떤 뜻인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조혁연 : 저번에 우리나라 노비 소유에 대한 관습은 대체로 ‘종모법’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모법은 송아지를 낳으면 그 어미 소의 주인집에 소유권이 귀속되는 것을 참고한 법이라고 얘기한 바 있는데요. 그러나 일천즉천은 종모법 관습을 무시하고, 부모 가운데 한 명이 천인이면 그 자식은 무조건 천인, 즉 노비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노비 인구 비율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연현철 : 일천즉천과 관련된 내용이 어떤 서적이나 기록물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조혁연 : <고려사>권85 ‘지’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천인류에 속한 자는, 그의 부모 중에서 어느 한 편이 천인이면, 곧 천인으로 되고 설사 본주인이 속량을 시켰더라도, 즉 양인으로 올려줬다고 해도 그가 낳은 자식은 다시 천인으로 되며 본주인이 후계자가 없이 죽으면 그 주인의 동족 즉, 친척에 붙였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즉, 한번 천인이 되면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연현철 : 사실 이렇다 보면 노비들도 결혼하기를 꺼렸을 것 같은데 그래도 결혼을 하게 됐다면 어떤 종류의 결혼 형태가 있었을까요.

 

▶조혁연 : 조선시대에 노비들의 결혼 형태를 보면 대략 4종류로 보게 됩니다. 잘 보면, 남자종과 여자종, 두 번째는 평민 남자와 여자종, 세 번째는 양반남자와 여자종, 네 번째는 남자종과 평민여자 등 대략 4가지의 결혼 형태가 존재했는데요. 이 가운데 조선시대 양반들은 ‘노취양녀’, 즉 ‘자기 집 남자 종과 평민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가장 선호했습니다. 

 

▷연현철 : 왜 그랬을까요. 역시 재산 증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까?

 

▶조혁연 : 네. 그렇습니다. 자기 집 남자 종과 여자 종이 눈이 맞아 즉 가내혼 결혼을 하면 자식을 낳죠. 그러면 재산 증식은 하나 뿐이 증식되지 않습니다. 반면 자기 집 남자 종이 다른 집의 평민 여자와 결혼을 하면 재산 증식이 ‘둘’이 됩니다. 왜 그러냐면요. 결혼을 했으니까 여자가 남자 집으로 오게 되죠. 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으니까 1+1이 되죠. 그래서 당시의 양반들은 자기집 남자종이 다른집 평민 여자와 결혼하는 것, 즉 노취양녀를 강권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노비들은 ‘가내혼’ 보다는 의외로 갑돌이와 갑순이, 즉 ‘동네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연현철 : 그런데 교수님 지난번에도 말씀해주셨는데 자기집 남자종이 다른 집 평민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경우도 종모법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혁연 : 종모법, 즉 어미소 집을 따라서 귀속됩니다. 이걸 따라야 하는게 맞는데요, 그런데 조선시대 최대 기득권층인 양반들은 재산증식을 위해서 일천즉천을 갖고 경국대전을 올리게 됩니다. 따라서 부모 중 한명이 노비이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이고 그러면서 남자종의 주인집도 노비자녀 소유권을 보유할 수 있게 되는데요. 이 때문에 경국대전 이후부터 양반들의 재산증식 방편으로 노취양녀를 선호했고, 그 결과, 노비인구가 급증하게 됐습니다.

 

▷연현철 : 그럼 노비 비율이 어느 정도 늘어났을까요?

 

▶조혁연 : 관련 논문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지방은 전체 인구의 40~50%고요, 그런데 한양은 훨씬 많은 70% 가까이가 노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이렇게 한양에 노비 인구가 많았냐고 하면요, 당시 사대부 또는 즉 최고급들은 사대문 안에 많이 살았죠. 그러니까 그들은 노비를 많이 소유했고 그렇기 때문에 노비 비율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대로 통일신라시대 노비비율이 6%가 조선후기 인구 절반 가량이 노비화됩니다. 영조임금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일천즉천을 없애고, 즉 둘 중 하나가 노비가 되는 것을 없애고 순수 종모법을 강력히 시행하면서 노비인구를 억제하려 합니다.

 

▷연현철 : 교수님 다시 노비 결혼 이야기 짚어볼게요. 노비들도 결혼을 하면 결혼식을 올렸을 터인데, 올렸다면 어떤 형태일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조혁연 : 굉장히 간략하게 올렸는데요. 각종 일기를 보면, 간단한 음식에 물 한 그릇 떠놓고 당사자 둘이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물 한 그릇 결혼식’인데요. 그렇게 결혼한 노비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1609년 제작된 운산부, 평안도에 있는 곳인데요. 여기에 호적부가 남아있어 조사해보니 솔거노비, 그러니까 집종의 결혼 비율을 보니까 여자 종은 21%, 남자 종은 14% 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물론 양반의 첩이 된 여자 종도 많았는데, 그때 생겨난 자식은 대부분 ‘부부지’, 즉 ‘아버지를 모른다’ 이렇게 기록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노비 소생, 즉 자식은요. 문집이나 족보에 그 이름이 거의 오르지 않았습니다.

 

▷연현철 : 그렇군요. 교수님 준비해주신 내용이 많은데 오늘 약속된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아서요. 교수님 오늘 방송이 마지막으로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청취자분들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혁연 : 그동안 변변치 못 한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기회 있으면 또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연현철 : 별말씀을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충북 지역 역사, 관련 이야기들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나중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조혁연 : 고맙습니다.

 

▷연현철 : 지금까지 조혁연교수와 함께 한 라디오 충북 역사 기행 시간 가져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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