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선권 여행작가 "서울의 역사가 흐르는 '청계천', 한때 하수구 전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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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진수 작성일2022.08.18 댓글0건본문
■ 출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행 : 이호상 기자
■ 2022년 8월 18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충북저널967' (청주FM 96.7MHz 충주FM 106.7MHz)
■ 코너명 : 여행스케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호상 : 2주에 한 번씩,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님 연결돼있습니다. 작가님, 나와계시죠? 안녕하세요.
▶김선권 :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이호상 : 잘 지내셨죠? 지난 번에 소개해드렸던 서울 덕수궁, 서울 나들이 코스로 함께 하면 좋을 만한 곳을 준비해주셨었는데, 이번에도 서울쪽인가요?
▶김선권 : 맞습니다. 앵커님, 혹시 서울의 물줄기라 하면 어디가 생각나시는지요?
▷이호상 : 서울을 잘 몰라서, 저는 한강이 생각나는데요. 당연히 한강 아닌가요?
▶김선권 : 그렇죠. 한강, 청계천을 많이들 떠올리시는데요. 서울의 물줄기라면 한강인데, 사실 6백여년 전, 조선에도 한양의 중심에는 한강이 아닌 청계천이 있었습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에서 복원된 청계천의 시작점인 청계광장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불과하니 두 장소를 묶어서 하루 나들이 코스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청계천을 준비했습니다.
▷이호상 : 아, 그러면 우리가 저번엔 덕수궁을 가봤었는데 오늘은 그럼 청계천으로 가나요?
▶김선권 : 그렇습니다. 복원된 청계천은 청계광장부터 고산자교까지 약 5.8Km 구간에 모두 22개의 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간격이 짧게는 150m부터 길게는 400m가 조금 넘기도 합니다. 오늘 청계천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복원된 청계천 구간에서 청계광장에서 세운교까지의 1.6Km 정도의 구간을 천천히 걸으며 만나는 다리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이호상 : 저도 개인적으로 청계천을 한 번 가봤던 기억이 있는데 그 당시, 참 깨끗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김선권 : 2~3회에 걸친 긴 이야기가 될듯합니다. 얘기할 거리가 상당히 많은 동네에요.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 상태의 하천이었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이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2년이 지나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청계천이 조선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있었고,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성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에는 청계천으로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습니다.
이 논쟁에서 세종대왕께서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 하천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 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호상 : 사실 과거 우리 역사적으로 보면 하천을 중심으로 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청계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거기에 하수처리 개념, 뭐 그 당시에는 하수처리개념이 없었을 것이고 환경오염이라는 개념이 없었을테니까요. 그런 개념을 더하니 약간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선권 : 네. 청계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죠. 그런데 청계천이란 말은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그냥 개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조선 시대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의 경계였던 개천은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청계천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이른바 '민족의 거리 종로'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차별의 선’이었습니다.
▷이호상 : 갑자기 영화 ‘장군의 아들’ 있지 않습니까? ‘장군의 아들’에서 보면 청계천 다리 밑에서 생활하는 걸인들이 있었고. 그 당시 청계천 주변에서 김두한과 하야시가 대립했던 이런 공간적 배경도 머릿속에서 그려지는데.
▶김선권 : 네 맞습니다. 도로의 확장, 주요 시설물의 신축 등 도시의 기반시설은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한 신문에는 "청계천 북쪽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은 청계천(淸溪川,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을 이름값 못하는 '탁계천(濁溪川,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고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울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흘러온 청계천은 하루아침에 더러운 하수구로 전락하여, 청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호상 : 청계가 한자로 맑을 청(淸)자 아닙니까? 탁계천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청계라는 이름과는 달리 더러운 이미지가 생각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김선권 : 네. 더러운 이미지가 컸습니다. 1945년 광복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잣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생계를 위하여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이 청계천 변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 위에 떠 있는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였습니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습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 지역이었습니다. 위생 면에서나 도시경관 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호상 : 작가님 설명을 들으니 제 머릿속에는 동남아시아 일부 개발도상국에 가면 수상가옥 있지 않습니까? 그 그림도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하고. 그 이유 때문에 청계천이 복개가 이뤄졌다고 보는데 맞습니까?
▶김선권 : 네. 그렇습니다. 정부는 이 문제를 깨끗하게 청소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이게 덮어버리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1958년 광통교 인근부터 콘크리트로 덮고 그 위에 도로를 만들고 또 그 위에 고가도로까지 만들어 청계천의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어려웠던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 ‘복개(覆蓋)'였습니다. 청계천 복개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이주를 당하여 또 다른 빈곤의 상징인 달동네를 형성하였습니다. 또한 광통교와 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께 훼손되었습니다. 더불어 청계천은 서울에서 가장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서울은 급격히 성장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청계천의 암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맑은 물, 청계는 잊혀 갔습니다. 돌이켜 보면 청계천만큼 서울의 역사를 극명하게 농축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1950년대 말 쓰레기와 오수로 뒤덮인 불결한 빈곤의 상징에서, 6~70년대는 성공적인 근대화로 상징되었으며, 8~90년대는 공구, 인쇄, 의류산업의 중심지임과 동시에 소음·혼잡·매연 등으로 도시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이호상 : 작가님 지금까지 청계천에 대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설명을 해주셨는데. 시간 때문에 여기서 마무리하고 2주 후에 우리가 복원된 깨끗한 청계천에 곳곳의 볼거리, 즐길거리를 소개해주시죠.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선권 :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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