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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선권 여행작가 "일제 치욕 담긴 경복궁 흥례문…근엄함 속 선조들의 해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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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원 작성일2023.11.1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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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  행 : 연현철 기자

■ 2023년 11월 16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충북저널967' (청주FM 96.7MHz 충주FM 106.7MHz)

■ 코너명 : 여행스케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방송 다시 듣기는 BBS청주불교방송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습니다)

* 본 인터뷰 내용을 기사에 인용하거나 방송에 사용시 청주BBS '충북저널967' 프로그램명을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연현철 :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님, 나와계시죠? 안녕하세요.


▶김선권 :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연현철 : 반갑습니다. 오늘은 어디를 소개해 주실 건가요?


▶김선권 : 지난달 말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복원한 월대와 현판 교체를 소개해 드렸었는데요.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정문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현철 :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실지 기대됩니다


▶김선권 : 광화문 안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경복궁이 두 번째 문인 흥례문이 있습니다. 앞으로 경복궁이 중심 전각인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문을 두 개 더 지나야 합니다. 총 세 개의 문을 거쳐야만 위엄있는 근정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의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주례에 따라 궁궐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연현철 : 그렇군요. 왕을 만나러 가기까지 상당한 절차가 필요하군요.


▶김선권 : 그렇습니다. 흥례문은 2001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이 자리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던 자리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있던 흥례문을 부수고 여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지어진 뒤로는 경복궁이 전부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상징이었던 궁궐을 허물고 식민지배를 위한 총독부를 세웠다니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945년에 조선이 해방되고도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곳에 무려 51년이나 더 있었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연현철 : 저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분노, 정서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선권 : 그렇습니다. 1995년 8월 15일에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에 완전히 철거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건물 철거를 진행하기에 앞서서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지우고 민족의 자긍심을 올리기 위해 철거하는 게 맞다.’라는 의견과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보존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나뉘어서 논란이 참 많았습니다. 이건 제가 일본인 관광객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베타랑 관광통역사분께 들은 이야기인데요. 철거 이전,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본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였다고 합니다. 이곳에 와서 건물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건물은 만져가며 옛 추억을 되뇌는 듯한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철거 이후에는 빈터에 방문해 눈물 흘리는 일본 여행객이 많았다고 합니다. 


▷연현철 : 그렇군요. 물론 그때라도 철거되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더 일찍 철거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김선권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흥례문 일원은 경복궁에서 가장 철저하게 유린당한 곳입니다. 잘 철거 했다는 생각입니다. 가장 먼저 철거했던 첨탑은 천안 독립기념관의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보관이라기보다는 처참하게 박제되어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정도면 충분히 아픈 역사에 대한 기억이 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흥례문에 들어서면 멀리 근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근정문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금천이 흐르고 금천을 건너기 위한 금천교가 놓여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궁궐의 정전 앞에 흐르는 물을 금천이라 부르고, 금천을 건널 수 있는 돌다리를 금천교라 부릅니다. 조선의 궁궐에는 모두 금천과 금천교가 있는데, 재미있는 건 궁궐마다 금천교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곳 경복궁은 금천에 놓인 다리를 영제교라 부르고 창덕궁은 금천교, 창경궁은 옥천교라 부릅니다.


▷연현철 : 그렇군요.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에 의해서 흐르는 물을 앞에 두고 궁궐을 건설한 건가요?


▶김선권 : 원래부터 흐르던 물은 아니고 외부에서 물줄기를 끌어와 조성한 인공하천이었습니다. 지금은 말라 있지만, 원래는 물이 흐르던 천(川)이었습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가장 근간이 되는 원리인데요.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곳이 명당이다.’라는 말이죠. 경복궁은 이 배산임수의 형식을 철저하게 따라서 뒤쪽에는 북악산을 앞쪽으로는 청계천을 둔 지금의 공간이 세워졌습니다. 거기에 더해 궁 안에도 이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 지금의 영제교 밑에 있던 작은 도랑에 북쪽 북악산의 물줄기를 끌어왔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이 다리를 해체하고 명당수도 다 메워서, 지금은 아쉽게도 물길이 말라있습니다.


▷연현철 : 안타깝습니다. 경복궁 복원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금천의 물줄기도 복원되어 옛 모습을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선권 : 그렇습니다. 금천과 금천교는 경복궁을 명당으로 완성해주는 것 이외에도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이곳의 기준이 되어, 왕과 백성들의 일상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기도 하고, 외부의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는 벽사(辟邪)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신하들이 다리를 건너갈 때 몸과 마음의 깨끗이 했는지 다짐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돌다리 양쪽의 석축(石築)에는 물길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경복궁을 지키는 네 마리의 ‘서수(瑞獸)’상이 있습니다. ‘서수’란 상서(祥瑞)로운 징조(徵兆)로 나타나는 짐승을 말하는데, 금천 석축에 있는 서수는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정수리에 뿔이 달려있으며 겨드랑이와 뒷다리 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게 나 있는 모습입니다. 이 상서로운 짐승은 천록(天祿)이라 합니다. 


▷연현철 : 천록이라고 하셨나요? 해태와 같이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짐승이겠죠?


▶김선권 : 그렇습니다. 천록은 전설 속의 신령스러운 짐승으로 "왕의 밝은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천록에는 왕의 밝은 은혜가 온 누리에 미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서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건 네 마리 표정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중 서북쪽에 있는 천록이 제일 유명한데 혀를 내밀고 있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미소 짓게 해서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서 ‘메롱해치’라는 이름으로 캐릭터화까지 되었습니다.


▷연현철 : 이런 표현을 해도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상상만 해도 귀엽습니다. 근엄해야 할 궁궐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은 조선 장인의 해학미와 이를 허용한 조선 왕실의 너그러움이라고 해석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김선권 : 그렇습니다.흥례문 서쪽 행각의 끝 유화문 북쪽, 근정문에 이르기 직전에 ‘기별청’이라 하는 건물이 있습니다.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발행하는 관보의 성격을 띠는 ‘조보(朝報)’를 발행하는 곳이었습니다. 


▷연현철 : ‘조보’라는 것이 오늘날의 신문의 일종이라고 보면 되나요? 


▶김선권 : 네 그렇습니다. 조보는 일종의 신문으로 지금의 관보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과거시험 날짜나 신하들이 올린 상소 및 그에 대한 왕의 답변, 그리고 인사이동과 외국 소식, 심지어 날씨까지 적히는 등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매체였습니다. 조보를 적은 종이를 ‘기별지(奇別紙)’라 했는데, 이 기별지를 내는 곳이 바로 ‘기별청(奇別廳)’이었습니다. 관리들과 양반들은 기별지를 받아야 조정의 소식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양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소식을 전달받았지만, 지방으로는 전령을 통해 며칠 분량을 한꺼번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며칠이나 몇 주 치, 또는 한 달 치를 한꺼번에 받게 되었죠. 기별지의 도착이 늦어지거나 하면 “기별청에서 왜 소식이 없지?”라는 말을 쓰다가 나중에는 “왜 기별이 없지?”로 축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소식이 없지’가 ‘왜 기별이 없지’로 혼용되었고 이런 까닭으로 ‘소식’과 ‘기별’은 언제부턴가 같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먹을 음식의 양이 너무 적거나, 먹고 나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할 때 불만스럽게 뱉는 말로 “간에 기별도 안 간다.”도 여기서 유래된 말입니다.

  

▷연현철 : 그렇군요. 재밌는 이야기까지 전해주셨습니다. 오늘은 경복궁 내부까지 둘러봤습니다. 작가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선권 : 고맙습니다. 


▷연현철 : 지금까지 여행작가 김선권작가와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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