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여행스케치] - 김선권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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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진수 작성일2022.11.14 조회804회 댓글0건본문
여행 그려주는 남자, 로드그래퍼 – BBS불교방송 ‘여행스케치’ 오송화장품뷰티산업엑스포
□ 출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행 : 이호상 기자
□ 프로그램 : 청주BBS 충북저널 967
□ 인터뷰 시간 : 11월 10일(목) 08:41~08:52
[앵커]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님 나와계십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김]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앵커]
오늘은 어디를 소개해 주실 건가요?
[김]
충청남도 부여에 있는 부소산성으로 가보겠습니다.
[앵커]
부소산성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 알고 있다 모른다, 가보았다 아니다 정도
[김]
부소산성은 백제 왕조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성 일대를 수호하던 산성입니다. 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부소산(扶蘇山)은 평상시에는 백제 왕실에 딸린 후원 구실을 하였으며, 전쟁 때에는 사비도성의 최후를 지키는 거점이 되었던 곳입니다.
산성은 테뫼식과 포곡식의 복합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성안에는 나당연합이 침입했을 때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낙화암과 새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계획했다는 영일루, 백제의 삼충신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삼충사 등의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앵커]
낙화암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 (부소산성이 낙화암이 있는 곳이군요 등...)
전에 작가님께서 상당산성을 소개해 주셨을 때 테뫼식과 포곡식에 관해 설명해 주셨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긴 하는데 청취자님들을 위해 다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김]
산성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포곡식 산성과 산 정상부를 둘러서 쌓아 마치 산이 왕관을 쓴 형태로 보이는 테뫼식 산성이 있습니다. 상당산과 우암산의 험준한 산세를 연결해 쌓은 상당산성이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고, 단양 온달유적지에 있는 온달산성이 대표적인 테뫼식 산성입니다.
부소산의 ‘부소(扶蘇)’는 백제 언어로 ‘소나무(松)’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소나무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화려한 단풍의 자태에 취했던 이유인지 소나무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고 단풍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앵커]
부소산성의 단풍이 꽤 아름다운가 봅니다. 이번 주말에 가도 단풍이 남아 있을까요?
[김]
부소산성은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아마도 이번 주말은 단풍이 절정에서 끝으로 치닫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화려한 부소산성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조금 걸어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어떤 코스를 택해도 좋지만, 언덕 오르는 것에 자신이 없다면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볼 것은 추천해 드립니다. 시계방향으로 돌며 전체를 돌아보려면 힘든 계단, 가파른 언덕과 마주하게 됩니다. 부소산성 입구에 설치된 안내문에서 제1코스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은 삼충사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세 분의 충신이 모셔져 있는 사당입니다, 사당 안쪽에 성충, 흥수, 계백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앵커]
계백은 황산벌전투 결사대의 그 계백장군이 맞죠?
[김]
네 맞습니다.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백제의 장군이죠. 그런데 전 한때 김유신 장군을 싫어했었습니다.
[앵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김]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불완전 통일이었지요. 그래서 지금은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르지 않고, 발해를 포함시켜 남북국시대라고 하잖아요.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지금 우리가 만주를 지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나당연합이 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끼리 싸우다 옆 동네에서 싸움 잘하는 애 데려와 싸우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김유신은 신라인이었습니다. 한국인이란 개념이 성립되기 이전의 시기이니 그는 자신의 조국인 신라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죠.
[앵커]
그렇네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김유신은 신라인으로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네요.
또는 이것에 대한 앵커님의 생각
[김]
발걸음은 해를 맞이하던 누각 영일루, 군사용 창고가 있던 터 군창지를 거쳐 테뫼식 산성길에 접어듭니다. 부소산성에서 포곡식 산성만이 백제 시대에 축조된 산성이고 테뫼식 산성은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포곡식 산성길에서는 부소산성의 이름값을 느끼며 산책할 수 있습니다. 산성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는 솔향 가득한 길입니다. 그리고 소나무 너머로 단풍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부여 읍내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반월루, 일제강점기 일제에 부역했던 황족들과는 달리 홀로 일제를 배척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의친왕이 쓴 현판이 걸려 있는 사자루를 지나면 돌계단 내리막길이 나옵니다. 돌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그 유명한 낙화암이 도달합니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앵커]
그럼 삼국유사에 삼천궁녀가 언급되어 있는 것인가요?
[김]
그렇지는 않습니다. 역사학자들은 3,000명의 궁녀는 과장되었다는 의견입니다. 당시 백제의 국력을 고려해보면 궁인의 수는 300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합니다.
삼천궁녀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9대 왕인 성종 때 문인(文人)인 김흔의 시조에 처음 언급됩니다. 김흔은 시조에서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전까지 삼천궁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문헌이나 자료는 없었습니다. 결국 궁녀가 3,000명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낙화암(落花巖)'이란 명칭도 고려 때 역사책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앵커]
그렇다면 왜 3천 궁녀 이야기가 전설로 남게 되었을까요?
[김]
백제 멸망의 이유를 부패와 타락에 두어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다른 측면으로는 백제의 멸망을 더욱 애절하게 느끼게 하기 위함도 있겠지요.
낙화암에서 언덕길을 내려가면 낙화암에서 떨어져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고란사가 다다릅니다. 고란사 뒤편에는 한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전설의 고란 약수가 솟아나서 백제의 왕은 이 약수를 마시기 위해 매일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실제로 3년이 젊어질 리는 없겠지만 가는 길에 이곳에서 목을 축이는 것도 좋을듯합니다.
고란사 옆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구드레 나루터로 이동하며 부소산성 투어가 마감됩니다.
유람선을 타고 가다 보면 절벽에 조선 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낙화암의 기암절벽도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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