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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여행스케치] - 김선권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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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진수 작성일2022.08.18 조회8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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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려주는 남자, 로드그래퍼 – BBS불교방송 ‘여행스케치’ 청계천 

 

□ 출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행 : 이호상 기자

□ 프로그램 : 청주BBS 충북저널 967

□ 인터뷰 시간 : 8월 18일(목) 08:41 ~ 08:52

 

[앵커]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님 나와계십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김]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앵커]

오늘은 어디를 좀 소개해 주실 건가요?

 

 

[김]

지난주 소개해 드렸던 덕수궁과 서울 하루 나들이 코스로 함께 하면 좋을 만한 곳을 준비했습니다. 앵커님, 갑자기 질문입니다. 서울의 물줄기라 하면 어디가 생각나시는지요?

 

 

[앵커]

저는 한강이 생각나는데요. 당연히 한강 아닌가요?

[김]

그렇죠. 서울의 물줄기라면 당연히 한강이죠.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양의 물줄기라고 하면 어디일까요?

 

 

[앵커]

오늘 어려운데요.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을 보니 또 한강은 아닐듯하고, 지난주에 소개해 주셨던 덕수궁과 하루 나들이 코스로 소개해 주신다고 하니 덕수궁과 멀지 않아야 하고, 혹시 청계천인가요?

 

 

[김]

네 그렇습니다. 600여 년 전 조선의 도읍 한양의 중심에는 한강이 아닌 청계천이 있었습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에서 복원된 청계천의 시작점인 청계광장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불과하니 두 장소를 묶어서 하루 나들이 코스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준비했습니다.

 

복원된 청계천은 청계광장부터 고산자교까지 약 5.8Km 구간에 모두 22개의 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간격이 짧게는 150m부터 길게는 400m가 조금 넘기도 합니다. 오늘 청계천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이 중에서 청계광장에서 세운교까지의 1.6Km 정도의 구간을 천천히 걸으며 만나는 다리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아볼까 합니다. 

 

 

[앵커]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듯하네요.

[김]

2~3회에 걸친 긴 이야기가 될듯합니다.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 상태의 하천이었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이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2년이 지나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청계천이 조선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있었고,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성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에는 청계천으로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습니다. 

 

이 논쟁에서 세종대왕께서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 하천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 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앵커]

그 시절에도 하수도 개념이 있었던 거네요. 하지만 생활하수처리시설에 청계천이란 이름은 조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사실 청계천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그냥 개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조선 시대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의 경계였던 개천은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청계천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이른바 '민족의 거리 종로'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차별의 선’이었습니다.

 

 

[앵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과 하야시가 대립했던 공간적 배경이 바로 이 청계천이군요.

 

 

[김]

그렇습니다. 김두한의 거지패들이 살던 곳도 청계천이었죠. 도로의 확장, 주요 시설물의 신축 등 도시의 기반시설은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한 신문에는 "청계천 북쪽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은 청계천(淸溪川,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을 이름값 못하는 '탁계천(濁溪川,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울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흘러온 청계천은 하루아침에 더러운 하수구로 전락하여, 청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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