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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5일 여행스케치] - 김선권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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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진수 작성일2023.06.15 조회2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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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려주는 남자, 로드그래퍼 – BBS불교방송 ‘여행스케치’ 영월 청령포 

 

□ 출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행 : 연현철 기자

□ 프로그램 : 청주BBS 충북저널 967

□ 인터뷰 시간 : 6월 15일(목) 08:41 ~ 08:52

 

[앵커]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님 나와계십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김]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앵커]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김]

오늘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가보겠습니다. 슬픈 역사가 서려 있는 유적지 청령포는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조선조 비운의 왕, 단종의 유배지였습니다.

 

 

[앵커]

청령포와 단종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 

 

[김]

단종하면 생각나는데 비운의 왕이죠. 문종이 승하하고 왕위를 이었을 때, 단종의 나이는 불과 12살에 불과했습니다. 1년 후 계유정난으로 삼촌에게 모든 실권은 빼앗기고, 또 2년이 지나선 왕위마저 빼앗겼고 다시 2년이 지난 17세에 목숨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우선 『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기록했지만, 『숙종실록』에서는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단종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자 함께 따라온 하급관리에 의해 교살을 당했다는 등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모든 게 설일 뿐이고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앵커]

정말이지 비운의 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왕이 즉위할 경우, 보호할 방법이 없었나요?

 

 

[김]

문종이 승하할 당시 어린 나이였던 단종은 정치적 기반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경우 대비나 왕비 등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단종의 경우에는 할머니인 소헌왕후와 어머니 현덕왕후가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 염려했던 문종은 황보인과 김종서 등의 대신들을 불러 단종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고, 이러한 고명대신들은 단종을 왕위에 올린 뒤 왕권에 위협이 되는 왕실의 인척을 견제했지만, 수양대군 일파는 계유정난을 통해 조정을 장악하고 결국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앵커]

그를 지켜줄 사람이 전혀 없었군요.

 

 

[김]

청령포에 가기 위해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남한강의 지류인 아름다운 서강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쪽으로 험준한 산이 가로막아 육지 속의 섬처럼 고립된 지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매표소가 강보다 높은 지대에 있는데 내려다보면 학창 시절 배웠던 사행천 곡류천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앵커]

배는 얼마나 타야 하나요? 강을 건너는 거니까 금방 가겠죠?

 

 

[김]

사실 이 정도를 건너려고 배를 타야 하나 할 정도로 짧습니다. 직선거리로 50m 내외입니다. 다리를 놓으면 편하게 다닐 수 있을 텐데, 왜 이 짧은 거리를 배를 타고 건너야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시는 분들도 계실 정도입니다. 좀 과장하자면 징검다리를 놓아도 될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명승지로 지정이 되어 있어서 다리를 놓는 등의 개발행위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강을 건너 청령포에 내려 50m 남짓 자갈밭을 지나 소나무 숲이 시작되는 곳에 금표비가 서 있습니다. 금표비는 이 비석을 기준으로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는 490척의 공간에 그 누구도 들어가서도 나와서도 안 된다는 경고문입니다. 이것을 어길 시에는 장형 100대로 다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단종이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닙니다.

 

 

[앵커]

장형이라면 곤장을 말하는 거죠? 곤장이 100대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 정도면 완벽한 고립 아닌가요?

 

 

[김]

금표비는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훗날 성종 이후로 단종이 복권되면서 백성들이 청령포에 출입해 벌채하거나 농사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앵커]

그렇다면 금표비가 세워진 시기부터 단종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겠는데, 이런 변화는 왜 생겼을까요?

 

 

[김]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입니다. 사실, 단종의 복권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조 이후의 모든 임금은 세조의 후손이고 이들의 정통성은 세조의 정통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종의 복권은 세조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동시에, 후대 임금들의 정통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지요. 자칫하면 정권의 기반을 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단종은 결국 복권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위패가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도 그를 임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단종에 대한 대중의 동정심과 더불어 16세기 후반의 지배층 교체를 들 수 있습니다. 

 

단종의 비극은 사림파가 집권하기 전이었던 훈구파 시대의 일입니다.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일은 일반 대중의 정서에 배치됐을 뿐 아니라, 사림파의 이념인 왕도(王道) 정치에도 어긋납니다. 조선 초기의 지배 세력이었던 훈구파와 조선 중기의 새로운 지배 세력 사림파의 정치적 충돌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앵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되어 있군요.

 

 

[김]

이 문제를 가장 잘 활용한 임금은 숙종이었습니다. 그는 단종을 복권시킴으로 생기는 손실, 즉 수양대군 이미지의 흠집보다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단종과 그에게 충성을 바친 사육신의 이미지를 활용하면, 극심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놓인 숙종 자신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높일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지요.

 

드라마 속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성종을 장희빈과의 관계만 생각하기 쉬운데, 성종은 정말로 똑똑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묘호인 성종의 성자가 이룰 성(成)자잖아요. 묘호는 임금이 죽은 다음에 붙여지는 것인데, 성종은 대체로 국가 체제와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군주에게 붙여지는 묘호입니다. 장희빈과 사랑만 했다면 성종이 아니었겠지요.

 

 

[앵커]

생각해보니 저도 성종하면 떠오르는 게, 장희빈과의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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